와인, 치즈, 불어의 공통점 말하기
- lkh950203
- 2023년 2월 23일
- 2분 분량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책부터 산다. 예전에 차가 있던 시절에 겨울이 되면 때때로 배터리가 방전됐다. 두세 번을 연거푸 배터리 충전 서비스를 신청했더니 매번 오셨던 기사님께서 좀 더 큰 용량의 새 배터리로 교체할 것을 권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물건인데도 잘 모른다는 생각에 그날 당장 교보문고 앱을 켜서 자동차를 검색했다. 30여분 간의 검색 끝에 며칠 뒤 우리집에 도착한 것은 『대한민국 자동차 명장 박병일의 자동차 백과』. 박병일 선생님이 어떠한 분인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 모른다. 아쉽게도 책을 읽기 전에 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와인과 치즈와 불어를 처음 만났던 순간들이 다 기억난다. 각각 『와인 폴리』와 『치즈 가이드』,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문법책이었다. 와인을 맛보고 추천하는 일이 직업인 소믈리에들은 와인이 생산된 지역 이름만 알아도 그곳의 기후와 많이 나는 포도 품종을 연결 지어 떠올린다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와인 겉면에 보르도라는 지역이 표기되어 있으면 프랑스 보르도는 멜롯과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이 주로 재배되는 곳이니 이 와인은 두 품종을 섞어 만든 것이라고 추측한다. 낱말 몇 개의 조합으로 풍부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신기한 일이다.
2월의 어느 날에 애인과 함께 치즈를 먹으러 갔다. 나름의 큰돈을 지불하면서까지 치즈를 먹으러 갔던 건 치즈의 맛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치즈 선생님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혼자 '치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김소영 선생님이 설명하는 치즈가 궁금했다. 선생님이 쓴 여섯 폭짜리 얇은 책자가 『치즈 가이드』다. 치즈를 만드는 과정보다 맛보는 일에 관심이 있는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치즈의 맛과 향을 두 폭에 걸쳐 정리한 표 부분인데, 치즈에서 느낄 수 있는 향을 아홉 가지로 구분하고 각각을 또다시 두세 개의 낱말을 사용해 그 맛을 설명해 두었다. 표를 보고 새로운 말을 배우는 기분이었다. 치즈를 먹고 그 맛을 표현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치즈의 문법으로 다른 누군가가 알아들을 수 있게 나타내는 건 또 다른 일이니까. 새로운 외국어를 더듬거리는 기분이었다.
아까 말한, 이제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프랑스어 문법책을 산 건 17살 때다. 용돈의 일부를 그 문법책 사는 데 썼다. 쓸 수 있는 돈이 정해져 있는 때였으므로 책을 고르는 기준은 무조건 가격이었다. 제일 싸고 얇은 문법책을 골라 학교로 돌아와 모의고사 문제를 푸는 친구들 가운데서 그걸 펼쳤다. 너무 싼 것이 문제였는지, 얇은 것이 문제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겐 설명이 불친절했다. 그 얇은 책 첫 장을 이틀 동안 붙잡고 씨름하다가 결국 내팽개쳤고 그 뒤로 그 책을 본 기억이 없다. 나중에 더 이상 입시를 위한 사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때가 오자 프랑스어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 가는 날이 매일 설레었다. 다른 언어로 말하는 건 다른 내가 되는 기분이었다.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이런 느낌일까 싶다. 나를 만들어온 익숙한 구조의 모국어를 떠나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말을 조립하는 경험은 경이로운 것이다.
새로운 말을 배우는 건 그래서 좋다. 입을 떼고 말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창조해 간다. 하나의 의미를 표현하는 수많은 방식이 있고, 그중에 내가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 나조차도 모르지만 말하고 표현하는 한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는 게 놀랍다. 그리고 서로의 머릿속을 전혀 알 수 없는 타인과 말을 쌓아나가며 의미를 주고받는다는 것,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백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감으로 느낌으로 믿으며 말을 쌓는다는 것. 말을 배우는 한 우리는 언제나 예술가이다. 그 말이 불어든, 와인이든, 치즈든.
202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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