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의 일은 이제 끝났을까
- lkh950203
- 2022년 3월 13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16일
박민정, 〈신세이다이가옥〉, 『바비의 분위기』, 문학과지성사, 2020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후암동이라는 동네에 관해 강렬한 기억을 하나 갖게 된다. 나에게는 좀 더 그럴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독립해서 처음으로 살았던 동네가 후암동 바로 옆이었다는 게 이유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후암동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남산 중턱까지 걸어 올라가곤 했는데 후암동을 걸었던 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목재로 만들어진 집의 일부 구조가 긴 세월을 지나 아직까지 남아있고, 일본식 기와가 얹힌 뾰족한 지붕과, 창문이 생경하게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직후에 일본군 병영이 들어서면서부터 용산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후암동에는 서양식 건물에 일본 양식을 결합한 가옥들이 생겨난다. 소설에 등장하는 ‘신세이다이 가옥’, ‘쓰루가오카 가옥’, ‘미요시와’, ‘적산가옥’은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를 뿐 모두 이런 집을 가리킨다. 신세이다이 주택지는 1932년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분양 당시 ‘한강이 조망되는 이상적이고 위생적인 주거지’라고 소개되었다. 일본인들의 고급 주택지로 개발되었던 탓에 해방 이후 적산(적의 재산)으로 분류되었고 1960년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급주택지로 여겨진다. 쓰루가오카 주택지는 1925년과 1927년, 1928년에 갈월동과 후암동의 경계부분에 조성되었던 주택지이고, 미요시와는 정확한 개발연도는 알 수 없으나 1920년 이후에서 1936년 사이에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신세이다이와 쓰루가오카, 미요시와는 그 구체적인 위치는 다르지만 모두 후암동 일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된 주택지였던 것이다. 적산가옥은 패전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 중에서 집을 가리키는 말로, 소설 속에 나타나는 주요 공간인 할머니의 집이 이런 ‘적산가옥’이라는 것은 소설 전체에 식민지배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징용에 끌려갔던 할아버지 이야기와 일본식 고택의 형식으로 지어진 집에 대한 묘사(p.133), ‘일본 사람이 버리고 간 집’이지 ‘일본 귀신이 들린 집은 아니’라며 콧방귀를 뀌었다가(p.138) 수진의 탈출을 보고 망령을 떠올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식민지배의 역사가 끝나버린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 기억이 가까운 곳에서 재생되며 무의식 속에 자리함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어른이 된 ‘나’와 부모님이 해외 입양되었다가 야엘 나임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사촌 강장희를 만나러 가면서 시작된다. 큰아버지는 이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희―장선―장훈 삼남매를, 새 가정을 꾸린 뒤에는 예은―예리 자매를 얻는다. 할머니는 ‘나’의 아버지와 상의하여 장희와 장선을 각각 다른 곳으로 해외입양 보낸다. 장희, 장선의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던 ‘나’의 어머니도 모르는 채로, 두 어린이는 어느 날 갑자기 가정에서 사라지게 된다. 반면 ‘할머니가 죽고 못 사는 손자’(p. 132)인 장훈은 남는다. 남자아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또 다른 인물인 결혼하지 않은 고모와 그의 딸 수진은 할머니로부터 계속해서 구박받는다. 별다른 이유 없는 그 구박은 어릴 적에 집을 떠난 강장희(야엘 나임)에게 고모는 가족이 아니라 함께 살던 ‘아주머니’로 기억될 정도이다. 할머니는 ‘나’의 부모님이 딸(나)을 낳은 후 아이를 더 낳지 않기로 하자 ‘피임도 유산도 죄받을 일’(p.128)이라며 아이 낳기를, 정확히는 손자 낳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혹시라도 생기는 게 딸이면 떼버리라는 말도 거침없이 했다. (p. 128)
후암동 집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에 의해 유지되는 이 가부장적인 가족을 나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발을 질질 끌었던 어린 시절’로 기억하며 사촌언니인 ‘수진은 전부 잊어버렸을’지 마음속으로 묻는다.(p. 141)
소설의 인물들이 다른 인물들과 혈연가족이라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나’의 남편은 오로지 나와의 관계로 존재하는 인물이다. ‘나’와 남편의 대화는 다르게 취급되는 서울의 여러 동네 관해서 그리고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에 대해서 보여준다. ‘나’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강남과 강북은 다르고, 청담동과 포이동이 다르고, 반포동과 내곡동이 같은 서초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르다는 것은 힘 있고 부유한 것,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어떤 선망의 대상이라는 걸 은근하게 표상한다. 소설 안에서 언급되는 각 동네가 서울의 어디에 자리하는가에서 눈을 돌려 더 넓은 눈으로 지명들을 살펴보면 이 동네들이 모두 서울의 한 지역임을 발견한다. 이 소설의 무대는 서울인 것이다. 후암동이 일제 강점기에 계획적으로 지어진 고급주택단지였다는 사실과 할머니가 이 집을 산 것을 자랑스러워한 부분, 후암동 주택을 떠나 고덕동 아파트에 다시 들어가고자 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서울 안에서 집을 구하려는 ‘나’의 모습이 서로 포개진다. 여기서 자본의 권력이 장소와 위치로 나타난다는 것, 그곳은 가장 서울다운 서울이라는 것을 재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가부장제와 식민지배, 부동산 자본의 힘이 어떻게 얽히는지, 그것이 어떻게 폭력으로 나타나고 얼마나 서로 유사한지를 보여준다. 각각의 폭력은 한 번에 하나씩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겹쳐지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식민지배 당시 자본이 누구에게 있었나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일본인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살던 집은 고급주택이 된다. 그 고급주택은 할머니의 소유가 되어 차별과 폭력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나’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일이 없었다면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힘든 시간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고모와 수진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억압적이었던 후암동 집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서 비교적 별 탈 없이 자라난 ‘나’는 자라면서 부동산의 지역 격차를 실감하게 되고 남편과 함께 이 새로운 구조에 적응하려 애쓴다.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는 더 작고 약하고 여린 존재를 지워버린다. 그들 중의 일부는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강장선), 살아남아 돌아오기도 하고(강장희·야엘 나임), 심지어는 ‘성공’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지만(강수진) ‘어떤 종류의 기억은 사람을 영영 망가뜨릴 수밖에 없기에’(p.127) 트라우마로 남는다. 시간은 언제나 흐른다. 다행인 점은 시간이 흘러서 시대가 변하면 사람들은 점차 과거의 시대정신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식민지배라는 이미 끝난 사건이 그 이후에도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유구한 가부장제의 역사가 인간을 얼마나 일그러뜨리고 슬프게 만드는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거대한 자본의 권력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그 결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관한 질문들은 아직 멈출 수 없다. 〈신세이다이가옥〉은 과거가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계속되는지 끊임없이 섬세한 눈으로 관찰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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